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든버러의 마리 (문단 편집) === 루마니아의 왕세자비 ===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루마니아의 국왕 [[카롤 1세]]의 조카인 왕세자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한 마리는 18살에 루마니아의 마리 왕세자비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 2세|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마리의 남편 [[페르디난드 1세]]는 숙부 카롤 1세에게 한 마디 하거나 아내를 위해 비호하거나 해줄 수 있는 용기도 없는 한심한 위인이었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와 약간 미친(?) 듯한 시숙모 엘리사베타 왕비와의 갈등까지 겹쳐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녀가 위안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